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율리시스 S. 그랜트 (문단 편집) === 군인과 민간인 시절 === 그랜트의 인생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은, 자신은 전쟁을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한 곳은 전쟁터였고 평상시에는 그 재능을 보일 기회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그랜트는 이 전쟁이 '부도덕한 전쟁'이라 비판했지만, [[재커리 테일러]]가 지휘하는 원정부대에 선발되었고, 여기서 대단한 지휘능력과 용기를 보여주며 대위로 승진했다. 사관학교 시절 동료들을 놀라게 한 승마술은 여기서도 위력을 발휘하여, 서부영화에나 나올 법한 말옆에 매달려 몸을 숨기는 기술을 실전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경리장교 역할로 돌아온 그랜트는 늦은 진급과 낮은 급여 때문에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린다. 그랜트는 "아내가 농장주의 딸이고 나도 가공업주의 아들로 경제 사정이 크게 나쁘지 않았음에도, 서부 오지에 파견되어 가족도 못보고 20~30달러의 빠듯한 월급으로 살림을 이어나가는 것이 절망스러웠다"고 말년에 회고하였다. 특히 그랜트가 근무한 서부는 당시엔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오지라서 돈이 있어도 구할 물건이 없는 수준이라, 개발된 도시에서 살던 그랜트가 불만스러울 법도 했다. 게다가 이땐 [[미국 정부]]도 서부가 사람들이 기피하는 지역임을 알아서, 사실을 왜곡하여 "서부에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식으로 홍보하였다. 이걸 믿고 온 민간인들과 군인들은 말 그대로 된통 낚인 셈. 그래도 이 외중에 [[파나마]][* 당시에는 아직 [[파나마 운하]]가 안 뚫린 상태라, 철도로 미국 동서부간의 수송을 위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철도를 미국인들이 건설하고 있었다.]에서 대규모로 [[말라리아]]가 번지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효과적으로 수습하면서 나름 명성을 얻기도 했다. 허나 경리장교로서의 그랜트는 서부의 열악한 환경에 시달리는 와중에 가족과 떨어져 복무해야 하게 되자 우울증과 술 중독이 더 심해진다. 대낮에도 술에 취해서 금화 개수조차 제대로 셀 수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고, 결국 그랜트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받을 것인지 퇴역할 것인지의 갈림길 앞에 선다. 더 이상 군인으로 생활하기 힘들었던 그랜트는 32세에 퇴역을 선택한다. 당시 미국은 [[상비군]]의 규모가 작고 처우가 열악해서 유능함의 여부와 상관없이 다수의 장교가 초급장교 근무만 마치고 퇴역하였고, 그랜트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남북전쟁 당시 미국에선 남북군을 통틀어서 장군의 상당수가 [[대위]]나 아무리 높아도 [[소령]] 정도로, 퇴역한 웨스트포인트 출신이었다. 남은 사람들도 진급이 어려워서 [[로버트 E. 리]]는 [[중령]] 진급 후 [[대령]]이 될 때까지 얼마나 남은지를 세다가 20년이 더 남았다는 결론이 나오자 진지하게 퇴역을 고민하였다고 한다. 그나마 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대령이 되었다. 심지어 중간에 2년을 잠정 퇴역해서 농사를 지었는데도 진급된 것이니 행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랜트의 선택은 미국 북부에나 그랜트 본인에게나 [[행운]]이었다. 만약 그랜트가 서부에 계속 남았다면 군인으로서 그랜트의 업적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1860년대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직전까지 퇴역을 신청하지 않은 서부의 연방군 장교 상당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에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능하다고 정평이 난 장교들은 처우가 좋은 동부로 차출되었지만 당시 그랜트의 경력을 감안하면 동부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전쟁 내내 서부에서 술만 마시며 금화를 셌을 확률이 높은 운명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예비역이 된 그랜트는 몇 년 동안 다양한 직업에 도전하지만 결국엔 모두 실패로 끝난다. 그래도 그는 가족들에겐 헌신적인 가장이라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자신의 [[금]] 주머니 시계를 팔기도 했다. 이때 그랜트는 장인에게 [[노예]]와 땅을 받아 노예노동 농장을 경영할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858년 가을, [[말라리아]]에 걸려 농사를 포기할 상태가 되자 장인이 노예를 보내준 것. 하지만 강경한 노예폐지론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노예주의자도 아니었던 그랜트는 차마 노예에게 일을 시킬 수 없었고, 결국 받은 노예를 다음해 봄에 풀어주고 말았다. 참고로 그랜트의 아내인 줄리아는 켄터키 출신으로, 아버지가 노예주였다. 반면 그랜트의 아버지는 강경한 노예폐지론자여서 결혼할 때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다만 켄터키의 노예주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성향이 큰 편이라, 처가 사람들도 이후 남북전쟁에선 북부에 합류하여 연방군이 된다. 그랜트의 고향인 [[일리노이]]는 기본적으로는 자유주지만 노예노동 자체는 주 남부에서 일부 진행되고 있었고, 주민으로서 노예주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편 지역 기술관료직에 응모해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장인 일가가 노예노동에 우호적인 민주당 지지자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어 거부된다. 결국 농사마저도 흉년과 질병으로 실패하고, 농장을 개간하면서 벤 나무를 장작으로 팔거나, 처가 쪽 친척의 부동산 사업을 도와주는 등의 부업으로 연명하게 된다. 갈 곳이 없어진 그랜트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죽제품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게 되지만 이것도 잘하진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이런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한 아들 그랜트를 차마 내칠 수 없어서, 경리 일은 계속하게 된다. 이는 원래 그랜트가 일반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막대한 대학등록금을 감당하기 힘들어[* 현재도 미국은 대학등록금이 비싸기로 악명높다.] 등록금이 무료인 사관학교로 갈 것을 권유하여 사관학교에 간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랜트가 [[내성적]]인 성격이다 보니 동료간 유대감도 적어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장교로 임관해서도 군대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행군]]도 엉망이어서 행군을 위한 군악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랜트는 회고록에서 군악에 대해 "나에게 군악이란 [[양키 두들]]과 양키 두들이 아닌 것밖에 없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군대에서 힘들어 하는게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아들을 내칠 경우, 아들이 노예농장을 하는 처가로 돌아갈 것도 우려한 것 같다.[* 아버지는 이전에 그가 처갓집 근처에서 농사를 시도했을 때도 반대했었다.] 허나 이때도 그랜트는 딱히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었는데, 같은 동네의 아마추어 정치평론가인 친구와 토론을 할 수준으로 머리가 좋은 걸 제외하면 '유능한 구석이 별로 없는, 사업 말아먹은 볼품없는 주정뱅이 중년 아저씨'가 이 시절 그랜트였다. --그래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 [[파일:attachment/Grant_1.jpg|width=100%]] || || 남북전쟁 중의 그랜트 || 허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그랜트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다. --미국판 한신?-- 그랜트는 일리노이 의용군에 지원했는데, 사실 그랜트는 본인이 군인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기도 했고 [[반전주의]] 경향 역시 강했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전쟁은 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평생 고수했다. 그래서인지 자서전에서는 남북전쟁 이전에 일어났던 [[미국-멕시코 전쟁]]을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상대로 벌인 가장 부조리한 전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더불어 '남북전쟁은 사실 이 전쟁(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미국의 전횡에 대한 일종의 [[천벌]]'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그가 남북전쟁에 자진해서 참전한 것은 연방이 무너지는 것을 국가적 위기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여튼 그랜트는 군사 경력이 인정되어, 일리노이 의용군 대령으로 임관된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연방군 준장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랜트의 군사적 능력은 빛이 나 서부전역의 남부측 요새인 포트 헨리, 포트 도널슨을 함락시키며 전장을 테네시로 밀어붙였고, [[빅스버그 포위전]]에서는 남군의 빅스버그 지원 시도를 적절히 차단하며 천혜의 요충지 빅스버그를 포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빅스버그 함락 이후에는 치카모가 전투의 패배로 위기에 빠진 테네시의 연방군을 [[채터누가]]에서 구원하는 데 성공했고, 1864년에는 마침내 '''[[미 육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참고로 그랜트는 육군 정규군에서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중장]]으로 진급했고, 1866년에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한다. 4성 장군이지만 현대 기준으로는 General of the army, 육군 원수직에 상응하는 자리.] 이후 서부전선을 자신의 오른팔 [[윌리엄 테쿰세 셔먼]]에게 맡기고[* 여담으로 그랜트의 보좌관 중엔 아메리카 원주민 [[엘리 파커]]도 있었다.] 자신은 동부전선 주력인 포토맥군에 종군하며 군을 직접 통제, 남군의 대표적인 명장인 [[로버트 E. 리]]와 격돌하여 그의 항복을 받아내서 전쟁을 종결시켰다. 전쟁 중 인명피해는 공격하는 입장인 북군이 더 많아서 의회에서는 그랜트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으나,[* 특히 1864년 6월 피터스버그 전투에서 1달 동안 118,000여명의 병력 중 45,000여명이 전사해 링컨 주변에서는 그랜트를 해임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랜트를 전폭 지지하여 계속 활약할 수 있었다.[* 이런 링컨과 그랜트 사이를 신임과 존중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일화 중 하나로 링컨은 그랜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귀관이 수행하는 작전의 세부사항에 대해서 본인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소. 귀관에게 어떠한 제한도 제약도 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무한 신뢰를 보내는 상관에게 그랜트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원하거나 기대하는 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면, 이는 각하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 밖에는 드릴 수 없습니다."] 여담으로 남북전쟁 중 그랜트는 Unconditional Surrender([[무조건 항복]])이라는 구호로 다시 한번 유명세를 탔는데, 이는 포트 도널슨 전투에서 그랜트가 '''남군의 무조건적인 항복 말고는 어떤 협상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U'lysses 'S'impson이라는 이름을 이용한 별명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